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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민주독재를 통해 바라본 대한민국의 민주독재와 프레이밍

세학 2021. 12. 15.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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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주의적 인격과 체제의 경우, 주된 목표는 기만이 아니라 위협이다. 독재자의 거짓말이 흔히 뻔뻔하며 또 기이할 정도로 비상식적인 것은 이 때문이다. (...) 완전한 독재 하에서, (...) 독재자는 인민이 그를 믿는가 여부에는 궁극적으로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는 모든 이를 확신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 그러나 모든 이를 복종시키고 싶어한다. 권력의 본질적 속성 중의 하나는, 아무리 거대해진다 한들 완전한 자신감을 절대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권력 상실에 대한 편집증은 권력자의 자연적 본성의 일부이다. 그가 대중을 반복해서 억눌러야 한다는 충동에 시달리는 이유이다. 거짓말은 무엇보다도 바로 이 목적에 종사한다.


중국의 집권당이 중국은 현재까지도 공산주의 국가임을 고집스럽게 주장하면, 선생, 교수, 공무원, 사업가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헌신을 공적으로 맹세하라고 다시금 강요한다면, 이는 민중이 여전히 마르크스를 따른다고 진지하게 믿기 때문이 아니다. (...) 복종의 의사 표시가 중요한 것이다. 이게 바로 독재자가 거짓말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 그리고 이를 참아내지 못한다면 그들의 적이자 박해의 표적으로 낙인찍힐 것이다. 


그러나 위협 외에도 중요한 것이 남아 있다. 혼란을 심고, 인민에게 기준틀을 제공하는 이성과 현실 인식을 어지럽히며, 국가와 세계로부터 나침반을 빼앗는 것 또한 위협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당신이 거짓말쟁이에다 협잡꾼이라면, 사기와 협잡을 멀리하는 세상,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세상에서 이길 방법은 없다. 따라서 다른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로 거짓말쟁이 협잡꾼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최소한 당신은 /그들의/ 거짓말쟁이로 남을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사람이 언제나 거짓말만 한다면, 그 결과는 거짓이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믿지 않는 민중은 생각하고 판단할 능력을, 종국에는 행동할 능력을 빼앗기는 셈이다. 아렌트가 말했듯이, "그런 인민한테는 원한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상적인 피지배자이다 - 또는 이상적인 적수이다. 


거짓말쟁이의 뻔뻔스러움과 거짓말을 당하는 사람의 수치는 동전의 양면이다. 적어도 그 자신이 다른 모든 사람과 협동하여 매일같이 떠받치는 주장이 터무니없음을 인식하는 동안에는 그렇다. 명백한 거짓말을 반복하는 행위는 다른 거짓말쟁이들과 공범으로서의 유대를 형성시킨다. 마침내, 지배자의 거짓말은 지배당하는 인민 사이에 냉소가 나라나게 한다. 인민은 그들이 처한 무력한 형편에 안주한 채 궁극적으로 단 한 가지에 매달린다: 지배자의 권력 말이다. 그 시점에 이르면 지배자는 더 이상 어떤 것도 해명할 필요가 없다. 그가 꾸며낸 것 외에는 어떤 진실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사라진 세상에서는 진실과 그 대안이 존재할 뿐이다. 지배적인 가치는 도덕과 책임감이 아니라 유용성과 이득이다. 만약에 진실을 깨닫는다 한들, 그걸 말하고 다녀서 좋을 것이 없다; 사실 이는 위험하다. 최선의 방책은 거짓을 사실로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 광신도는 이렇게 한다. 그러나 광신도는 언제나 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차선책은 진실을 배우기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무감각한 무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 그리고 혹시라도 진실을 마주치게 되면, 입 다물고 그런 적 없다는 듯 행동해야 한다. 대다수의 민중은 이 두 집단 중 하나에 속한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멍청하거나 자살이라도 하려는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 똑똑한 자는 사실을 바로 알고 현명한 이들이 아니다; 똑똑한 자는 교활하고 약삭빠르다. 더 이상 상식이 설 자리는 없다. 아니, 무지가 새로운 상식이다. 무지는 생존에 필수적이거나 기회주의적인 출세를 정당화하는 데 쓰인다. 


물론, 진실에 관한 행위 일체 - 진실을 찾아내고 언어로서 전달하는 것 - 는 철학적으로 쉽지 않은 문제이다. (...) 어느 한 집단 내에서, 사람들은 진실에 접근하고자 노력하고, 각 개인에게 조금씩 달라 보이는 세계에 대한 공통된 이해를 얻고자 한다. 그러나 밖에 비가 오는데도 날이 청명하다고 우기는 독재자는 고의로 세계를 뒤엎어 놓는다. 그는 자기 의지에 따른 세계를, 단어들이 원래 의미와는 반대인 것들을 의미하는 세계를, 모든 사람이 지도자 곁에 옹기종기 모여서만 유지될 수 있는 세계를 창조한다. 이 지도자는 대개 새로운 세계에 걸맞는 새로운 인간형을 창조하고자 한다. 외부에서 보기에, 이 세계는 정말이지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내부으로는,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믿는 마지막 사람조차 혹시 자기가 미친 게 아닐까 끝내 의심하게 만드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는 자기 눈을, 자기 귀를, 자기 기억을 믿기를 멈추고 그가 강제로 주입된 정보만을 가축처럼 씹어 삼키게 될 것이다. 

자기만의 진실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독재자는 세상을 정복해야 한다. 중국에는 억압이란 없다; 단지 '안정유지'(維穩; 웨이원; 유온)와 '조화로운 사회'(和諧社會; 허셰셔후이; 화해사회)가 있을 뿐이다. 지난 십 년간, 조화는 중국공산당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였다: 질서와 복종 간의 조화 말이다. 조화는 일반인이 소란을 피우지 않을 때를 의미했다. 

이는 검증된 전술이다: 적의 단어를 뺏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라. 조지 오웰이 일깨워주었듯이, 자유는 노예제가, 무지는 힘이 된다. 그리고 중국은 법치 하의 민주국가가 된다. 이게 바로 중국공산당의 선전이 말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는 맞긴 맞는 말이다: 중국에는 헌법이 있긴 하고, 헌법 제 35조는 인민공화국의 시민에게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 그리고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중국에도 '의회'란 것 또한 있다: 전국인민대표대회 말이다. 또 '선거'도 있으며, 시민에게는 주기적으로 그들의 '신성한 권리'인 투표권을 행사할 것이 촉구된다. 


오래 전, 레닌은 '민주집중제'란 것을 개발했다: 이론에 따르면, 민주적으로 선출된 관리가 선출된 뒤에는 일절 반대 없이 정책을 결정할 특권을 갖는 제도 말이다. 이후 모택동은 '인민민주독재'를 주창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중앙집권과 독재가 언제나 지배적이었다; 민주주의는 인민의 목구멍에 쑤셔넣어진, 허울뿐인 수사에 불과했다. 따라서 체제의 피지배자가 체험한 '선거', '신성한 투표권, 그리고 '자유'는 하나의 끝나지 않을 광대놀음에 불과했다. 단어는 의미를 모두 상실하고 부정당했다. 시민이 체제에 위협적인 영향에 감응되지 않는 백신을 놓은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났다. 다른 세계에 접촉하는 일이 생기면 - 이는 세계화된 시대에 많은 중국인의 평범한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 그들은 위험한 사상을 나타내는 위험한 단어에 감염되지 않을 터였다. 

 

독재자의 목표는 언어를 통해 정신을 잠식하고 조종하는 것이었다. 중국공산당 선전의 최고 목표는 '사고의 통일'(統一思想; 퉁이쓰샹; 통일사상)이다. (...) 전체주의적 기구는 모든 사고와 행동을 통일하고자 한다; 모든 '사상공작'(思想工作; 쓰샹공쭤)의 목적이 바로 이것이다. 목표는 모든 개인으로부터, 개인의 감정, 판단, 이상으로부터 개인성을 벗겨내는 것이다. 이제 오직 '중국몽'이 허용되며, 중국공산당이 그 예술감독을 맡는다. 개인은 위대한 유토피아에 융합되어야 하며, 그들 각자의 정신은 그에 맞춰 새로운 형태로 단조되어야 한다. 


 


중국의 선전은 끊임없이 새로운 단어와 어구를 내뱉는다. 오늘의 중국은 기상천외한 모순의 나라로서, 사회는 중국공산당이 그렇게나 강력하게 추구하는 만사의 통일에 어긋나는 방향으로 빠르게 가지치며 다양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나라인 이상, 중국공산당은 모든 모순을 통일할 수 있는 조어를 만듦으로써 그러한 모순을 제거하고자 한다. '중국 특색 사회주의'는 그 일례이다. 또는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도 그러하다. 이러한 조어는 상화좌우를 모두 포괄하며, 모택동주의적이면서 동시에 신자유주의적이다. 언어는 논리를 제압했고, 그러므로 스스로를 불가침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실에서 언어는 더욱 더 공허하고 부조리해져가고 있으나, 언설이 아닌 권력이 중요한 나라에서 그런 건 큰 의미가 없다. 사실 많은 경우에, 단어의 기능은 의미가 아니라 지시를 전달하는 것이다: 끄덕여라! 잊어라! 무릎꿇어라! 그리하여 선전 기구는 달라이 라마를 히틀러에 비교하면서도 온 나라의 신문 편집자들에게 절대 '진실과 거짓,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을 혼동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도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진실과 선, 아름다움은 물론 당과 그 단어이다. 


자연적으로 중국공산당은 현실을 해석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또한 현실을 창조하기도 한다. "중국에는 반체제 인사가 없습니다." 자꾸 얘기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이 말은 2010년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류샤오보에 관해 언급면서 한 말이다. (...) 류샤오보는 언제나 "범죄자"일 뿐이다. 반체제 인사라니, 무슨 말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