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과 복기

배달하다가 주택가에서 얼룩말을 만난 이야기

세학 2023. 3. 24.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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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하다가 주택가에서 얼룩말을 만난 이야기

 

 저는 코로나 때 천금을 벌 수 있다는 소문만으로 직장을 때려치고 광주에서 서울로 상경한 사람입니다. 직장에서 부당한 일들을 참아가며 매일 일을 하지만 월 230정도의 월급으로는 미래를 계획할수도, 미래를 향해 나아갈 길도 전혀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수도권에서 배달 일을 하면 월 500은 누구나 벌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상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름대로 커뮤니티 같은 곳에서 여기저기 뒤져보며 현실적인 부분을 타진한 뒤 상경하기는 했지만 소문으로만 듣던 배달일과 실제 배달일은 달랐습니다. 도로사정은 생각보다 더 지옥같았고, 사람들이 말하는 월 500, 월 1000만원 버는 사람들은 무사고인 저로써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XXX같은 운전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 운전 방법으로는 도저히 월 500이라는 매출에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네. 그냥 패배자의 푸념입니다. 그냥 문득 생각난 것이니 적당히 용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쨌든 어제도 그 허황된 꿈을 포기한 흐릿한 일상의 일부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제도 저는 기운이라고는 한 줌 없는 무채색의 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 흐릿한 제 일상에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은 상상이라도 해 보셨습니까? 한국의 길거리에서 얼룩말을 만나는 시츄에이션을 말입니다. 어떤 누군가는 헛소리 말라고 하겠지만 진실입니다. 저는 주택가에 배달하다가 얼룩말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혼란스러움에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심장이 두쿵두쿵 뛰는 것이 제 귓가에 울릴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저는 얼룩말이 길을 비켜주기를 바라는 심경으로, 차에게 길 양보를 해주는 심경으로 갓길로 오토바이를 물렸습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숙였던 고개를 들어 얼룩말을 조심스레 쳐다보았습니다.

얼룩말도 저와 제 오토바이의 굉음을 듣고 놀랐던 것일까요? 얼룩말은 두 앞발을 가지란히 모으고 망부석처럼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아니. 가만히라는 말은 좀 어폐가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황당하게도 얼룩말은 똥을 싸고 있었으니까요. 강아지들이 흥분하거나 긴장하면 제자리에서 오줌을 싼다는 것과 같은 맥락일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그제서야 얼룩말의 표정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동물의 표정이라는 것이 사실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저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얼룩말도 저를 보고 깜짝 놀라 경악한 상태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한참을 제자리에 서 서로를 쳐다보던 저는 조심스레 오토바이의 시동을 끄고 얼룩말의 상태를 지켜보았습니다. 오토바이의 굉음이 잦아들자 얼룩말은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푸릉 푸릉 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말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하지만 녀석이 흥분 상태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슨 용기였는지 알 수 없지만 저는 녀석에게 조심스레 다가갔습니다. 평소 들었던, 말이 흥분하면 생각보다 흉폭해진다는 사실은 기억나지도 않았습니다. 순전한 동정심.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운이 좋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녀석은 의외로 제 품에 안겨 가만히 서 있었고, 동동거리던 발도 멈추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조심스레 동물단체와 119에 연락을 해 녀석을 보내주었고, 저는 녀석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서야 다시금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 수 있었습니다. 

원래 예정보다 20분 이상 늦은 배달에 손님은 제 오토바이처럼 굉음을 내지르며 항의를 하였습니다. 저는 좁은 길에서 얼룩말을 만났다. 무작정 지나치기에 지나치게 좁은 길이었고 피할 수 없었다. 라는 말로 항변했지만 그자식은 도무지 제 말을 믿어주지 않고 그냥 환불처리를 하겠다며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뭐 그렇습니다. 설사 제 말이 맞다 한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른 시간, 뿌옅게 아롱진 헬맷을 연신 닦아내며 집으로 향하는 제 오토바이에는 53000원짜리 배달음식이 실려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이 순간에도 1.5평짜리 고시원으로 돌아와 방바닥에 가만히 누워 그 때의 일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흥분했던 그녀석의 콧김소리, 동동거리던 발굽 소리, 그리고 제 품에 안겨 조용히 고동치던 그 녀석의 심장소리. 그 모두가 제 흐릿하던 무채색의 인생에 있어 처음이었습니다. 

 

 
 
 
 
 
 
 
 
 
 
 
 
 
 
 
 
 
 
 
 
 
 
 
 
 
 
 
 
 
 
 
 
 
 
 
 
 

이 글은 인터넷 커뮤에서 이슈가 된 일을 토대로 간단한 소설을 써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