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포트 연구자료 등 탐독

진보는 상식이 아니다. 구태에 대한 질문이고 새로운 답을 구하는 과정이다

세학 2021. 5. 20. 11:15
반응형

싯펄,.... 내가 평소에 하고 다니는 이야기인데, 나보다 글을 만배는 잘 썼네..... 이래서 엘리트 엘리트 하는구만. 나는 찌그러져야지....

 

 

 

서울대학교 대나무숲

5월 18일 오후 12:00 

#6228번_제보

 

사회대 학생회에 이슈가 생겼다.

이번 사회대 축제에서 토크 콘서트를 하는데, 정치인 이준석을 불렀다는 것이 이슈가 되면서 규탄 연서명이 생기고, 논란이 커지고 있다.

이런 문제제기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확실히 이준석씨는 요즘 이슈이고, 당대표 출마까지도 한 상태이기에, 축제가 정치로 오염되거나, 토크콘서트 자체가 이준석씨의 선거운동으로 소비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연서명의 성명문은 이런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연서명은 다음 두가지 이유로 현 사회대 학생회를 규탄하고 있다.

 

 

1. 축제 기획 과정이 비민주적이고 부당한 절차에 의해 진행되었다.

2. 이준석은 혐오의 정치인이니 학내에 들여서는 안된다.

첫번째 이유는 공감이 된다. 학생회의 일처리가 부당하게 진행되었다면 그것은 문제제기되야하며 전면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두번째 이유는? 이건 정말 정치적이고 진영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이번 토크 콘서트는 이준석의 단독 무대도 아니고 민주당 정치인인 표창원도 오는 등 젊은 층에서 인기가 좀 있는 유명인들로 초청인사가 구성되어 있다. 근데 여기서 '이준석 반대'를 연서명의 제목으로 내놓는 것은 그저 이 문제를 정치화시킬 뿐이다. 게다가, 이 정치화라는 것에 대해서 제대로 된 인식조차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준석씨에 대해 혐오의 정치인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개인의 사유 내에서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한가지 방향의 해석일 뿐이지 이준석이라는 사람 내부에 본질적으로 '혐오의 정치인'이 포함되어있다던지 하는 것이 당연히 아니기에, 그것은 보편적으로 옳은 사실이 당연히 아니다.

그러니 연서명이 **** '이준석은 혐오의 정치인' 선언을 한 이상 당연히 이 문제는 정치적, 진영적 힘겨루기로 흘러갈 것이다. 이미 에타는 이런 모습이 되어버렸고, 아마 이 글의 댓글도 그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연서명 기획 측이 자초한 모습이지만 그래도 이 글의 댓글에서는 다른 방식의 비판들이 나누어졌으면 좋겠다.)

연서명을 지지하는 글 중엔 이런 글도 있었다. 이준석에 대한 연서명의 반대는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이유' 이며 '절대적으로 옳은' 이유이지만 그것은 대중을 상대로 하는 정치에서는 통하지 않으니 '반박불가능한 현실적 근거'로 정치적 승리를 거두어 진보의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글.

 

 

정말 경악스럽다. 이게 사회대생들이 가진 '진보적 가치'와 정치에 대한 생각의 현실이란 말인가.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환상에 빠져 있으니 그것이 진영정치적 행동이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문제 해결은 커녕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

연서명 안의, 연서명 지지자들의 사유 안의 엘리트주의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그것보다는 나는 진보주의자이니 연서명과 지지글에서 나타나는 '진보의 가치'가 얼마나 비진보적인지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우선 상식. 상식적으로 옳은 것은 진보일 수 없다. 진보는 상식에게 던져지는 물음들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물음들에 대답해야 하는 것이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이 변화는 약자의 고통과 갈등을 낳는다. 세계 속에서 터져나오는 갈등과 문제점들은 기존 상식에 대해 이렇게 물음을 던진다. '그게 맞습니까?' 라고.

이 때 상식은 항상 보수의 역할이지 진보의 역할이 아니다. 왕의 통치는 신의 뜻인 것이 상식이었고, 자본가가 모든 이익을 가져가는 것도 상식이었으며, 성소수자는 정신질환인 것이 상식이었다. 이렇게만 말하면 보수 비난이라고 할 수 있으니 다른 식으로도 이야기해보자. 전통적 윤리관은 상식이었고, 그것은 세계를 안정적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주류경제학은 충분히 검증된 지식이자 상식이기에 경제정책을 안정적으로 제시할 수 있게 도와준다.

반면 진보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역할인 것이다. '그 상식은 세계의 복잡성을 담아내지 못한다. 그것은 약자를 억압하고 숨기며, 그들의 존재를 지운다. 우리는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내야 한다.' 라고. '상식적인 것'은 진보적일 수가 없다. 상식이라는 기존의 체계가 이 세계를 '충분히' 설명하고 그것이 안정적임을 이야기하는 것은 보수의 역할이고, 기존 체계가 불완전하며 안정적이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진보의 역할인 것이다.

그렇다면 합리는? 합리, 이성,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역시 진보의 편이 아니다. 이성 대신 감성 따위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합리니 절대성이니 하는 것은 어떤 흐릿한 공통감, '상식'과 기존 체계에 기대어 존재하고 다시 그 체계를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성과 감성의 이분법적 구분이나 절대적 진리 따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환상임을 근대를 지나 현대에 온 인류는 이미 알고 있다. 특히나 기존 세계, 아니, 기존 '체계'가 묘사하는 세계의 모습을 넘어서서 그것이 담아내지 못하는 것을 봐야 하는 진보주의자라면, 그런 초월적 시선을 가져야 하기에 철학적인 사유로는 보수보다 훨씬 앞서고 있고 앞서야만 하는 진보주의자라면 당연히 이성,합리,절대성 따위로 진보를 이야기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진보의 입장에서, 초월적인 시선에서 바라본 합리란 무엇일까. 합리라는 것은 특정 방향의 시선에서 바라본 세계인 '체계'의 내적 통일성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합리성은 보편적이거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국소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다. 이 내적 통일성을 가진 체계들은 필연적으로 붕괴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 통일성이 숨기는 어떤 모순들에 있다. 모든 체계는 그것을 뚫고 지나가려고 하는 모순과 문제점들을 애써 무시하거나 부정한다. 하지만 그 문제점들은 어느 특정한 순간 체계가 더이상 감당불가능한 수준까지, 도저히 숨길 수 없는 수준까지 터져나오게 되고, 기존 체계는 필연적으로 붕괴하게 된다. 이는 경제학의 붕괴와 재정립, 과학의 붕괴와 재정립, 민주주의 이론의 붕괴와 재정립 등 인문학/과학/사회학 등의 모든 '체계'에서 발견되는 통일적 체계 자체의 특징이다.

 

 

진보의 가치를 어떤 완성된 체계로 바라보는 것, 그것을 완성된 '합리'이자 '상식', '옳은 것'으로 바라보는 것은 이러한 체계의 특징과 진보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 구시대적 태도시다. 진보의 빛이 (마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러했듯) 미래에서 선명하게 빛나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완전한 진리를 추구하는 식의 진보는 1968년에 죽었고, 완전히 죽어야만 한다. 프랑스의 68혁명은 기존 마르크스주의 기반의 '절대적 진보'의 폐기처분 선언이자 새로운 진보의 해일과도 같았다. 이때 전세계 사람들은 기존 질서와 권위 전반에 대해 저항했으며, 그 중심은 20대와 대학생이었다. 이에 대해 기존의 구좌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어떻게 평가했었는가? 그들은 혁명에 대해 어리석은 젊은이들이 정말로 중요한 계급 투쟁과 인류의 해방의 길, '절대적으로 옳은 것'을 알지도 못하는 채로 그저 소란을 피우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구좌파는 사망 선고를 당했으며, 들뢰즈와 가타리가 이야기한 대로 욕망하는 자들에 의한, 터져나오는 물음들에 의한 기존 체계의 파괴와 재생산이야말로 진보 그 자체이고, 터져나오는 물음들을 대변하고 이 물음들에 대한 대답을 하는 것이 진보가 해야할 일이라는 것이 명확해졌다.

하지만 68혁명 이후 50년동안 진보는 다시 어리석어졌고 절대성의 늪으로 돌아가버렸고, 그것은 현대에 이르러 정점에 도착했다고 느껴진다. 조던 피터슨은 현대의 진보 운동권 세력에 대해 '포스트모던 네오막시스트'라고 명명했다. 물론 지젝에 지적대로 그런 마르크스주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피터슨의 지적은 반대 방향으로 타당하다.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간단한 형식을, 그것의 절대적 진리성을 훔쳐와서, 포스트모던한 어렵고 복잡한, 하지만 가장 중요한 사유들을 대체해버린 가짜 포스트 모더니스트 진보 운동가들이 세계에 우글거리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시대적 사유, 다시선적 사유, 체계 파괴적 사유와 체계초월적 사유는 모두 저리 치워버리고, 교조화된 '절대적으로 옳고,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특정 체계만을 쳐다보고 숭상하는 것이다.

 

 

진보 운동권과 정치권의 사유 수준은 점점 후퇴했고, 그들의 실패는 계속해서 현실로 터져나오고 있다. '기생충' 과 '조커'는 이들의 실패를 통렬하게 비판했고,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 한국 20대 남성의 보수화(사실 보수화가 전혀 아니다.)와 최근 오세훈의 당선은 그 실패를 증명한다.

이런 사유 부족의 진보는 이번 연서명에서 확실하게 캐치가 된다. 이준석의 '혐오'는 무엇인가? 그것이 개인의 무근거적 가치 판단을 통해 보편적 가치를 부정하고 약자를 공격하는 '혐오발언hate speech' 인가? 아니다. 그는 약자를 억압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그의 혐오는 페미니즘이라는 체계 내에서 지적하는 여성 억압의 상부 구조인 '미소지니musogyny'인가? 그럴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이준석 개인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그도 우리도 상부 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분명한데, 그의 위치에서 그가 미소지니를 발현하는 것이 어떻게 그 사람을 반대할 근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퍼트리는 (페미니즘 체계 내에서의) 악성은 이준석 개인의 특징이 아니기에, 오히려 그를 받아들여 논의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또 페미니즘이라는 '체계'에 물음이 던져지고 있는 요즘, 그 체계를 상식으로 해서 판단하는 것이 진보스러운 태도인가?

 

 

나는 이 연서명에서 사용되는 '혐오'가 철저히 흐릿한 공통감에서 비롯되고 있는, 그들의 상식 속의 '이미지'로써의 혐오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체계 속에서 체계를 흔들어놓는 장난꾸러기 악마 요정과도 같은, 그 체계를 고수한다면 명확히 설명될 수 없으며 그저 '혐오'라고 명명되는 것이 최선인 체계 붕괴의 징후, 체계의 '죽음본능'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전혀 합리적인 것도 아니고, 상식적인 것도 아니며,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렇다면 이준석의 발언들과 이준석이라는 정치인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이준석은 기존 페미니즘을 포함한, 진보의 체계에서 터져나오고 있는 우글거리는 모순들, 체계 붕괴의 징후를 대변하고 있다. 이준석은 그 붕괴의 징조들인 20대 남성들의 분노들을 붙잡고 모아서 자신의 자유주의적 신보수의 체계로 통합하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물음은 제기되었고, 기존 상식은 더이상 옳은 것이 아닌 시대가 되었으며, 그것은 진보적 가치도 마찬가지이다. 이준석은 이 시점에서 자신의 보수적 가치와 체계로 붕괴된 체계를 대체하려고 하고 있다. (그것의 성립가능성과, 그 체계의 우열은 논외이다. 나는 그것이 세계를 잘 설명하지 못한다고 본다. 기존 진보의 체계가 잘 설명하는 분야에 대해 굉장히 무력하며, 역으로 그런 부분을 무시하고 숨기는 기능을 한다.)

 

 

반면 이 연서명은 어떻고 연서명에 대한 지지글은 어떠한가. 그들은 자신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진보적 가치'에 만족하고, 체계에 만족하고 있다. 터져나오는 모순의 목소리들을 애써 무시하고 타자화하고 존재를 지우며, 자신들은 절대적으로 옳다고 스스로를 재확신시킨다. 체계 아래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터져나오는 목소리들을 무시하면서. '우리는 옳은데 대중들은 몰라줘. 어쩔 수 없이 이 옳음을 위해 가상적이고 실증적인 정치적 전략을 펴야해' 따위의 이야기를 한다. 세상에 실증적이지 않으면서 옳은 것, 그런 피안의 세계의 이데아와 천국같은 것은 없다. 세계에서 터져나오는 물음이야말로 실증적이자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들이고 그 유일한 것들을 최대한 포함하고 최대한 배려하는 것이 진보라는 것을 저 자칭 진보주의자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 그저 미래에서 오는 진보의 빛, 저 피안의 진리의 세계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 당장 옆에 쌓여있는 현실적 모순들을, 바로 눈 앞의 고통받는 자들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번 연서명 주도자들과 지지자들에게 묻고 싶다. 체계 아래에서 우글거리며 터져나오는 고통받는 이들의 목소리에, '물음'에 귀기울여 봤는가? 진보적 가치가 무엇이고 '진보'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1. 진보의 가치는 상식에 도전하는 것

2. 68운동 시절의 가치가 상식이 된 현재

그 가치추구로 인한 모순들이 발생

3. 이준석은 그 모순을 내포한 상식에 도전하는 사람이다.

4. (사견) 그런의미에서 이준석은 보수의 통합호소인이라고 불리우지만 현시점에서는 진보적 가치를 가진 사람이 되는것.

5. 현재 자칭 진보라고 하는자들은 기존체제에 안주하는 보수집단

6.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다원화를 추구하는데 자칭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인 현 진보진영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진리로 간주, 그것에 도전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외면하고 억압한다.

7. 헤겔의 변증법적유물사관에 따르면 우리가 말하는 보수가 '정'이었고, 진보가 '반'이다. 그리고 이준석은 '합'을 시도하는 사람.

8. 그러나 진보적 가치가 상식이 된 현재는 진보가 '정'이고 '합'을 시도하는 이준석은 '반'이 되는 것.

9. 이처럼 세상은 고정적이지 않으며 유동적이다.

10. (사견) 이런 역사의 흐름에 둔감하고 자신이 진리인양 떠들어대고 현실에 안주하는 자들은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에 대해 깊이 사색하고있지 않다.


대한민국은 도대체 진보는 진보가 맞는지 보수는 보수가 맞는지 혼동이 됨 나의 사견으로는 대한민국에 진보세력이라 주장하는 부류는 오히려 폐쇄적이고 고리타분하며 시대역행과 정치적 퇴보를 야기함 되려 일부 극단주의자들을 제외한(이 사람들이 바보같이 자기들 세력의 응집을 방해하고 중도층의 유입을 더 방해하는 거 같음) 보수세력이라 하는 자들이 오히려 사전적 의미의 진보나 정치적,사회적으로의 진보에 가까운 듯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