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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수급자 본인 썰 모음

세학 2021. 8. 19.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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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네이버스 후원중

12월것도 나갔는데 안찍음 

 

 

초-중-고 때 엄마 혼자 외벌이라 집에 없어서 매일 육개장 사발면만 집에 사다놓고 그거 먹음 

진짜 질리게 먹어서 20살 이후로 컵라면 절대 안 먹음... 

(라멘은 먹음ㅎ, 봉지라면은 손이 고자라서 못 해먹음 ㅎ) 

당연히 돈 없어서 어디 활동간다 하면 거의 다 못 가는건 기본이지 

 

돈 없어서 급식비 못 내니까 

점심시간에 배식 담당이라도 해보면 어떻겠냐고 해서 두어달 해봤는데 

 

애들이 놀리는거임! 

 

그래서 가오 상해서 그만 두고 점심되면 걍 굶었음, 

 

소설 속에서 보면 물로 배도 채워봤고 ㅋㅋ 

(지금 생각해보면 사실 그 가오가 뭐라고 ㅋㅋ걍 견뎌냈어야 했는데 ㅋㅋㅋ) 

 

그나마 나라에서 이런 저런 복지들이 있어서 쌀도 받고 식사 카드 같은거 있어서 김밥천국 가서 김밥 사먹을 수 있었음. 

(이것도 가오 상했는데 김밥 맛있어서 어쩔수 없었음) 

 

그리고 알바하면서 많이 얻어먹음,

(중3부터인가? 그때부터 알바했던 듯. 돈이 없으니까 그만둘수가 없어...) 

일 열심히 잘하니까 사장님이 생일 케익도 챙겨주고 식당 이모들도 이뻐해주고 뭐 그런 경험 해보니 정말 '일을 잘해야 한다'는 걸 느꼈음. 

 

10대을 이렇게 지내보니까 

20대는 ㄹㅇ 독하게 살았음. 

 

뭐랄까 걍 돈을 안쓰고 저축하고 이런게 아니라 일을 한번 하면 인정 받을 때까지 함.

 

군대에선 짬 좀 먹고 매일 연등하고 연등 이후 자리에 와서 led 켜서 책보고 공부하고 하루 4~5시간만 자고... 

 

회사 들어가서는 제일 일찍가서 제일 늦게 나오고, 냉장고에 음료수 채우고 10까지의 결과물을 가져오라고 받으면 15, 20까지 해서 가져감

그렇게 하다보니 인정 받고 조금씩 올라가게 됐음. 

 

좀 딴 얘기인데,  

요즘 애들이랑 일해보면 좀 답답함. 부족함이 없이 자란 애들은 대충해 일을... 은수저 쉑 

간절함이 없어 요즘 것들~

점심을 물로 배를 채워봤어야 독하게 일하지 ~ 

(농담...) 

 

이제 경제적으로 안정되니까 어릴 때 못 해봤던 것들 하나씩 해보는게 삶의 낙인데 

돈 벌면 족족 써서 돈 안 모임 ㅋㅋㅋ 

 

최근엔 전세로 이사 왔는데(대출 풀~) 

엄마가 너무 좋아함...

(엄마 이거 빚...언제...갚아...)

 

암튼 나도 어린 시절 좀 힘들게 자랐다보니 기부 시작 했는데 

한국 애들은 내 세금에서 나가고...

해외 애들이나 조금씩 도와주려고 하고 있음. 

 

 

진짜 배고픔은 도와주고 싶음...

 

배고픔은...정말 삶이 너무...잔인해짐. 

 

 

 

[요약]

1. 기초적인 삶의 부족함이 있다면 나라에서 지원해주는 것들이 은근히 잘되어 있어서 이런 것을 지원 받으면서 살아야 함. 

2. 나도 어릴 때, 나라에서 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한국 애들은 내 세금으로 도와주고 해외 애들은 소액으로 기부함 

3.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냐고 하면 가기 싫긴한데, 돌아가면 사시 공부할 거 같다...시대가 달라져서 개천에선 용은 커녕 뱀도 되기가 힘들어...


  난 중딩때부터 기초수급대상자였고 이 기초수급이란 제도의 거의 초창기 였던 거 같아. 왜냐면 2인가족 기준으로 초기엔 월 10만원~15만원 나왔던 기억이 나. 단 이런 실질 금전지원 외에 의료지원에선 혜택을 상당히 받았음. 거의 무료였지. 근데 난 진짜 아플일이 없어서 나보단 엄마가 많이 혜택을 받았음.  엄마가 나 초딩 6학년때 교통사고를 당하셨는데 그 뒤로 일을 제대로 못하셨거든. 정말 간신히 풀칠만 했다. 그때 생각하면 우리 모자가 세상물정을 너무 몰랐어. 엄마도 너무 순진했고.  지금 같으면 병원 들어눕고 교통사고 보험금, 합의금이네 뭐네 진짜 몇백 몇천은 기본이잖아?

 

근데 엄마는 자기 집에 없으면 나 혼자 있고 하니까 병원도 안가고 그사람이랑 개인 합의를 했는데 얼마 받았는 줄 알아? 30만원. 그사람 월세방에 찾아와 무릎꿇고 앉아서 합의했던 기억이 나는데 무릎한번 꿇어주고 30만원 받고 퉁쳤으니 그사람은 횡재했지.

 

그리고 엄마는 그 뒤로 평생 허리장애를 얻었구. 진짜 너무나 착하고 순진하고 약아빠지질 못했던 엄마야. (ㅆㅂ 쓰고 나니 보구싶다) 

 

진짜 그전에도 가난했지만 이때부터 가세가 엄청나게 기울었어. 왜냐면 후유증으로 유일한 벌이를 하던 가장인 엄마가 일을 제대로 못하게 된거니깐.  

 

 본격적으로 정부 지원대상이 된 건 중학교 들어가고 부터야.  사회복지사도 없던 그 시절에 동사무소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우릴 지원대상으로 지정하고 해주더라고. 동사무소분들이 임대아파트 알아봐주고 중3되서 처음 아파트 들어가봤다.ㅋ 다만 이것도 무료는 아니야. 기초수급자도 임대아파트 보증금 내야하고 월임대료 똑같이 내. 단 엄청 싸지. 당시 그 싸게 해준 임대 보증금 낼 돈도 없었지만 분할납부가 되서 분할납부를 했고 월임대료는 일반 임대료보다 30%?정도는 더 싸게 나왔던 거 같아. (관리비는 일반계층과 큰차이는 없던 거 같아)

 

중학교때 동사무소에서 연결을 시켜줘서 민간단체에서 도시락 후원을 받았음. 그때 처음 그 민간단체사람 만나서 내 어른 대하는 태도가 좋지못하다며 한소리 들었는데 그때 너무 억울했던 기억이남.  내가 그땐 상당히 소심하고 자존감낮고 해서 사람얼굴 못마추지고 말도 못붙였는데 그게 그 지원단체 사람한텐 어른한테 인사도 잘 안하는 불량학생으로 보였나봐.(어쨌거나 중학교 졸업할때까지 식권 지원은 해주심. 감사했지.)

 

장학금 지원 얘기도 있었지만 공부잘해야해서 전교에서 뒤쪽에서 놀고 있던 난 불가능ㅋ  등록금은 그래도 엄마 벌이로 가능은 했는데 중학교 수학여행을 제주도로 가는데 그때 비용이 꽤 들었던거 같아. 난 안간다고 하니까 선생님이 안타까워 하셨던 기억이 남.(당시 담임이 학교에서 폭력교사로 이름날린 분 top3인데 나 기초수급인거 안 뒤로 진짜 나 터치를 안하시더라.ㅋㅋ 마음만은 여리셨음)

 

고등학교 들어선 지원금이 늘었는데 월 40정도는 됬어. 당시 물가 생각해도 적기는 한데 둘이 아껴쓰면 임대료랑 관리비 내면서 살아가는 건 가능한 수준이었지.(속된말로 죽지 않을 정도는 줌) 예나 지금이나 이 지원금이란 건 그사람이 백프로 모든 생활이 풍족하도록 지원한다기 보다 근로 가능여부를 따져서 "부족한 건 일해서 벌어써라"에 가까운 거라서 저렇게 나왔던 거 같아. 근데 엄마가 허리때문에 실질적으로 일을 못해서(아파서 일은 못하는데 그렇다고 장애등급까진 아닌 애매한상태) 정말 저 지원금 40이 울 모자 월수입 전부 일때가 많았어.정말 난 악작같이 돈 많이 버는 알바만 찾아다녔음.

 

그래서 고등학교때 심야에 풀로 뛰는 주유소 알바를 했는데(먹을 걸로 괴롭힌 총무 개색끼 갑자기 기억나네. ㅆㅂㄹ) 너무너무 피곤했거든. 새벽에 차 없을때 몰래몰래 선잠자는게 다였음. 그러다가 분명 사무실 안에 있던 내가 눈떠보니 차량에 기름넣고 있어서 깜짝놀라

 

 "손님 얼마 주유한다고 하셨죠?" 

 

했던 적 이후로 이건 미친짓이야 하며 야간에 풀로 일하는 건 때려치고 (그당시 야간에 풀로 알바하면 40좀 넘게 줬었나..) 학교 끝나고 12시까지만 알바할 수 있는 주유소에서 일했던 거 같아.   

 

하여튼 그렇게 알바하며 졸업했고 당시 나 없으면 생계가 곤란해서 그 사유로 군면제도 받았어. (많은 유게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내가 공돌이질 하면서 수입이 늘어 영세민이 떨어지기까지 이 지원금은 점차 올라서 종국엔 50가까이 받았던 거 같아.

 

내가 꾸준히 일을 하면서 영세민이랑 임대아파트도 소득대비&재산대비 자격이 있어서 결국 재심사에서는 떨어졌고 다시 아파트 나와서 월세 살이가 되긴했는데 하지만 내가 그만큼 벌게되고 소득이 는 거니까 더 필요한 사람들 한테 가는거지 뭐. 그리고 이 시기쯤 차상위계층도 지원한다는 제도가 만들어졌었는데 내가 차상위계층 자격기준보단 많이 벌더라고.ㅋㅋ(그당시 차상위계층 자격으로 월 벌이가 120을 넘으면 안됬어나.. )결국 신청못함. 다행히 좀 더 벌어서 나중엔 조그만한 전세로 들어갔으니까 가난하게 산거치곤 평타는 친거 아닌가 싶다.

 

 다만 내가 어느정도 벌게된 후부터도 부담이 없던 건 아닌데 역시 의료비..  생활, 주거 이런 것보다 의료비 지출이 진짜 장난이 아니더라고. 나는 병원 갈일이 거의 없었지만 엄마는 나이가 들고 점차 먹는 약도 많아져서 이건 진짜 부담이 컸어. 우리가 뭐 형편이 좋아 민간보험 들어놓지도 않았구. 이때만큼은 영세민때가 그립다는 좀 이기적인 생각을했지. (사람 욕심이란게 그렇잖아)

 

그래도 뭐 이젠 추억인거같아.  이젠 병원비 낼 일도 없어졌고..

 

나도 한때 영세민이어서 하는 얘기지만 기초수급자들 너무 색안경끼고 미워하지마. 분명 제도를 악용하는 사람도 있겠지. 언더독사례도 있을꺼야. 그래도 나같은 경우 그걸로 간신히 졸업하고 일하며 20대 초반을 지낼 수 있었어.  현재 어려운 생활하면서도 제도에 들지 못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 있다곤 생각해.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영세민떨어지고 나서 딱 그심정이었거든.  근데 반대로 기초수급대상자라는 건 여러사정으로 인해 일반인이 기본적으로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지불하는 돈도 못벌만큼 가난하기에 지원을 받는 거라고 생각해.  

 

앞으로 제도를 악용하지 않도록, 기초수급대상자도 안되고, 차상위도 안되고 애매한 위치해서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해소할 수 있게 정부가 노력을 해야하지 싶다. 

 

내 얘기 끗.


일단 내가 7살때 여름 비오는날에 아빠가 막걸리 먹고 나랑 엄마 때리고 욕하다가 집나갔는데
급류에 휩쓸려 죽음
그날 날짜까지 존나 생생하게 기억난다 2002년 8월 17일 태풍 루사 불때였다
그전까지는 우리집은 부산 북구에 존나 가난한 반지하였거든
아버지는 부산 사상쪽에 공단 공돌이였고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는데 결혼하고 그만뒀음
그런데 나 3살때 IMF 때매 아빠 잘리고 비정규직으로 들어갔음
맨날 술먹고 나랑 엄마 패는게 일상이었고
지금 남아있는 기억중에 제일 옛날게 4살땐가 아빠한테 변기통에 머리 박혀서 울었던거임 ㅅㅂ
아빠 사후에 엄마가 공단쪽에 취직했는데 존나 정신없이 살아서 아빠 빚 8500만 포기할 생각도 못해서 지금 빚만 1억임
그리고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때인가 공장에서팔한쪽잘려서 장애인됬고, 공장에서 잘려서 시장에서 야채팜
그래서 우리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어서 영구임대 11평짜리에 들어왔어
중학교때 까지는 동네에 주공아파트만 존나게 있어서 다 비슷비슷하게 가난해서 별로 자각못했어
그런데 내가 고등학교를 집에서 좀 떨어진 데를 갔거든
그런데 거기는 중산층 이상이 주로 사는 동네야
혹시 여기서 부산 북구 사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00동이라고 있어(동네이름 가려도 부산사람이면 알거라 생각해)
내가 학교다닐때는 지어지지 얼마안된 존나 신도시였어
고1 때 내가 우리반 애가 나 거지라고 욕하고 맨날 때려서 나도 한대 때렸거는
그런데 알고보니 그애 아버지가 개인병원 원장이었고 걔는 공부도 잘했어
당연히 나만 존나 까이고, 그애는 그냥 풀려났음
이거보닌 노력이라도 존나게 해야겠다는 생각, 최소한 시장에서 야채파는 어머니 폐끼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ㅇㅇ
그래서 그날부터 고등학교 3년동안 정시만 존나게 파서(내신 빡센학교였거든) 15학년도 수능에서 국어 하나 틀리고 수학, 과탐 다맞추고 영어하나 틀려서 올1등급 나옴 ^^
물론 그때가 역대급 물수능인것도 있겠지만, 나는 어쨌든지 서울 SKY서성한 중에 하나 화학과에 합격했어
내가 들어간 학과는 대부분이 강남서초 금수저들이 오는 과였어. 부산 흙수저 기초생활수급자인 나는 존나 주눅이 들었지. 거기애들은 확실히 말하는거나 그런게 논리적이고 교양있더라.
OT가서 내가 기초생활수급자이고, 가정환경이 이러이러하지만 그래도 당당하게 정시로 왔다고 밝혔어.
어짜피 언젠가는 들통날거 미리 선수쳐야겠다는 생각이었겠지.
그런데 거기 애들은 욕은커녕 나한테 박수를 쳐주고 참 열심히 살았구나 해주었어. 그게 내가 처음으로 들어본 진실된 칭찬 같아보였어. 확실히 공부잘하고 환경좋으면 인성도 좋더라.
나는 집이 가난해서 장학금 나오는거랑,대장금(머통령이 주는거,나는 기초수급자래서 학기별 180 더받고 학점 4.1 찍어서 250 더받음 ^ㅗ^)로 돈걱정은 안할수있게됬어
학교근처에 반지하방 하나에서 과친구들이랑 사는중임 ㅇㅇ
그런데 어릴때 맨날 못먹고 처맞고 다닌거때매 좆같은 성격(우울하고 소심,우울증)은 안고쳐지더라
그래서 지금 정신과 통원치료중이야
군대는 포병으로 장성에서 다녔고(16년1월군번) 지금 2학년 복학중이야
그리고 이번학기에 과에서 전체 3등했고, 여친은 아직 없어.
확실히 살다보면 어떻게라도 되더라

써놓고보니 나 진짜 머단하게 살았네


1. 아버지 어머니 이혼하시고 아빠랑 둘이.살았었음

2. 대략 고2때부터 우리 가족은 수급자혜택 받기 시작함.

3. 나는 아빠랑 사는데 아빠가 간암,난 학생이라서 수급자 기준에 부합.

4. 이때 수급자자격으로 영구임대아파트를 얻음. 말 그대로 영구적으로 살 수 있다만 월세준다던가 하는건 불법

5. 수급비 라고해서 한달에 생계지원금이 나옴. 2인기준 70만원 정도였다. (10년전 기준)

6. 별도로 쌀과 가사도우미, 병원비까지도 혜택을 받음.

7. 생계비와 병원비때메 수급자 포기를 못함. 그래서 아버지 돌아가실때까지 직장생활 못했다. 직장다니면 오히려 병원비 생활비 마이너스가 되버림..

8. 이러한 이유로 직장생활 못함-> 스펙못쌓음-> 무기력증 상승

9. 물론 공부 잘 해서 고소득직장 바로 취업하면 되었으나 불행히도 난 그런 대단한사람이 아니얐음

10. 혹시 나와 비슷한 가정사 있는 형들 그래도 수급자 신청하면 도움되는 것도 많으니 꼭 신청하도록해..


고졸게이다.본론으로 들어가서 우리집은

한부모였어.초3때 돈으로 이혼하고 아빠,나,동생

이렇게 셋이사는데 이게 한부모가정이

기초생활수급자에 적용되는모양인가봐.저 카드가

나온게 2011년도인데(정확히말하면 신청해서

발급된게) 여름방학부터 저걸 썼다. 저 카드에 대한
솔직한 심정은 정말 싫었어.중3이면 한참

남들시선의식하고 사춘기겪는 그런나이잖아.

예를들어 저카드를 들고 빵집에가면 (하루하루

사용가능한금액이4천원,이틀몰아쓰면8천원 이런

시스템이었어) 딱 빵을 4천원어치 갖고가서

카운터에 카드를 말없이 내밀었다.그 순간이

너무싫고짜증나고내가비참해지는순간이야.

계산하는사람이 속으로 비웃지않을까 이런생각이

너무많이들고 쪽팔렸다.그래도 2틀모아

짜장면시켜먹으면 솔직히 개꿀이었음.

인정할건인정하고 고마운건고맙지만 짜장면

아저씨한테 카드내미는순간에도 정말

여러가지생각이들었었다.저사람도 나를

못산다고비웃지않을까 이런생각말야.그래서 나는

저카드가 싫었어.친구들한테 저카드안들키려고

맨날집에두고나오고 애들끼리 서로 막놀리다보면

어떤놈이 너 기초생활수급자지?그럼 잘사는새끼가
어떻게알았냐 하면서 지들끼리 웃는데 나는 진짜

제대로웃질않았어.아니 웃질못했어.쨋든 내가

정말숨기고다닌끝에 친구들은 아직도 내가 그

카드쓰고다녔단거모름.어쨌든 나는 저카드를 작년
고3까지 쓰고다녔다.내 의지가 아니라 아버지가

사오라고맨날시켜서 항상내가가야됬어. 동네

편의점을 갈때도,김밥천국,빵집..전부 방학땐

저카드쓰고다니는데 계산하다 아는애들만날까봐

항상조마조마했던기억이난다.근데 동생도 카드를

같이받아서 하루에 카드두개로 8천원,이틀모으면

16000원으로 짜장면이나 먹었다. 급식카드가

정말좋은취지로 만든카드고 나도 그카드덕에

방학때면 많이먹을수있었다. 그점은 정말 나라에

감사히생각한다. 하지만 문제는 애들끼린

아무래도 저런걸 꺼리는경향도 있고

한참민감할시기였으니 기초생활수급자란

이름부터바꾸고 인식도 바꿔줬음한다.

길고재미없는글읽어줘서고맙다.


내 나이는20대 중반이고

얼마 안되는 짧은 내 인생 얘기를 하고싶은데, 친구들은 내 집안 사정을 잘 몰라서.. 얘기 못해.. 그래서 여기에 몇 줄 써볼게.

머릿속에서 가장 옛날의 기억을 끄집어 내면 유치원 때인데 이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하게 잘 살았던 거 같아. 아침에 Tv보고 유치원 갔다가 저녁에 차타고 돌아와서 놀고..

초등학교 때는 공부도 열심히 하고 친구들 하고도 잘 지냈던 기억이 나.

초 5 때 아버지랑 어머니가 이혼을 하셨어.
이 때 이유는 잘 몰랐어.. 엄마가 나한테 외삼촌 일을 도우러 가신다고 하고 나가셨거든. 그리고 며칠 뒤에 아버지께서 말씀해주셔서 알았지. 난 대성통곡을 했고 결론적으로는 엄마가 바람펴서 이혼한 거였지.

그 이후로 방황기를 좀 보내다가 중학교에 올라가서 공부에 재미를 붙여서 친구들하고 같이 공부도 축구도, 게임도 재밌게 했어, 이 때 친구들하고 제일 친하고 , 만나면 제일 재밌고 그래.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야.

공부를 나름 열심히 해서 성적도 꽤 좋았어 (반에서 1,2등 경쟁) 이 때 마냥 삼성전자에 연구원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서 인생 목표가 막연하게 ‘삼성전자 연구원’ 이었어.
실제로 생기부를 보면 장래희망이 그렇게 적혀있어

근데 중3 때, 아버지께서 다리가 다치셔서 잠깐 일을 쉬셨는데 우연스럽게 병원에서 신장병 말기 진단을 받게 됐고, 그 때부터 일을 그만두셨지

우리집 수입원은 아버지 1명 이었던데다가 모아놓은 마땅한 자산도 없어서 1년만에 기초생활수급자 신세가 됐고, 집도 임대아파트로 이사갔어

나는 삼성전자 연구원은 개뿔.. 대학교의 꿈을 접고

내가 빨리 취업해서 집안을 어떻게든 지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공고에 입학했어(중학교 때 선생님이 뜯어 말렸는데 그냥 지원)

고등학교 때 목표는. ‘학교에서 무조건 1등 해서 이 학교에서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으로 취업한다’ 였어

그래서 3년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해서 한전에 합격 했지. (대졸과 비교해 봤을 때 나한테 ‘열심히’라는 표현을 쓰는 게 맞나 싶다.’)

고등학교 3년동안 가장 힘들었어.. 친구들과 관계는 좋았는데 돈이 없으니까.. 옷도 잘 못 사 입고.. 먹고싶은 것도 못먹고 여름, 겨울 친구들하고 여행도 못가고ㅠㅠ

그런데. 한전에 붙었자나~~?

입사하고 나서 나는 내 인생이 필줄 알았어.

ㅋㅋ

아주 큰 오산이었어.

나 혼자 두명을 먹여 살리는 게 전혀 쉽지 않더라
월급을 반토막만 받는 것 같아(msg 조금 쳐서)

요즘에 동기나 친구들하고 ‘지금까지 얼마 모았냐’ 뭐 이런 얘기하면 나는 그냥 말을 잘 안해. 물어보면 ‘그냥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라고 대답하지.

나는 회사에 들어와서 남들 다 하는 명품 사서 인스타에 올리고 여행 다니는 거 자랑하고.. 이런 거 1번쯤 해보고 싶었는데

나도 나중에 결혼 해야 하고, 동생 대학교도 보내야 하는데 ! 그래서 돈을 열심히 모으려고 어떻게든 해보지만! 잘 안잡혀. 그래서 슬프고..ㅠ

여러가지 두서없이 주저리 주저리 썼는데.. 그냥 얘기 하고 싶었던거 썼어. 어디 쓸 곳이 마땅치 않더라구

결론은.

지금까지 힘들게 살아왔는데
회사 들어오면 바뀔줄 알았는데
바뀐 게 없고 생각이 더 많아진다.
그냥 돈버는 기계같고 목표가 없고 무료하다.
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 부양할 생각에 앞이 탁 막힌다

인생 선배님들! 앞으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조언 부탁드립니다

왜 나는 흙수저일까
왜 나는 평범한 그냥 진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지 못한거지
엄마 왜 그랬어요
나 너무 힘들단 말이야 ㅜㅜ